파편과 각인

김미정/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지알원 작가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시각예술 작가이다. 작가의 작업을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이는 다소 불필요한 설명일 테다. 그러나 이 문장은 작가는 물론 작업에 대한 표면적 진술이기에 행간의 숨은의미들을 검토해 보아야한다. 그 필요성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건 짧은 기간 동안 작가의 작업을 보면서 
떠오른 질문들을 복기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처음 작가가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며 자신의 주요한 정체성인 ‘그래피티/스트리트 아트’에 대해 설명했을 때 나는 그래피티의 성격과 그 형식적 특징에 작가의 작업을 덧대보거나 연결점 혹은 차이를 찾는데 급급했다. 그래피티와 시각예술을 분리하거나 양자의 관계를 위계화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래피티의 성격을 현재 작가의 작업과 접합할 때 이 둘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충돌의 지점을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공장소에서 허가되지 않은 비제도적 실천이면서 동시에 오랜 하위문화의 전통을 지닌 그래피티/스트리트 아트는 이제 시각예술의 한 장르로 제도와 자본의 주목을 받는다. 한편 시각예술의 범주 안에서 ‘미술 작가’라는 역할로 전개되는 작업 세계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은 작가의 작업에 있어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차이가 있다면/없다면? 혹은 그래피티가 미술제도 내부로 이행시 그 고유한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은채 수용 가능할까? 다듬어지지 않은 질문들의 연속은 최근 테미예술창작센터 결과 보고전에서 선보인 작가의 신작을 비롯해 향후 작업 세계를 어떠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투박한 고민이기도 하다. 이에 본 글은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오독과 오해의 지점을 경유하며 작가의 작업을 ‘각인’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이름을 재생하기

작가는 대부분의 작업에 "지알원 왔다감"이라는 표식을 남긴다. 이 행위의 목적은 분명하다. 언젠가 사라질 이미지의 주체가 자신임을 증명하는 드러내는 표식이다. 그런데 이 '드러냄'의 의지는 서명이라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작업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즉 작가에게 그들이)가 누구인가를 기록하는 행위는 서명처럼 그(들)를 자신이 선택한 장소로 인양하려는 것과 같다. 그렇게 작가는 거리의/전시장의 벽과 어둠, 틈새와 같은 지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점차 분절되고 잊히는 누군가를 표기한다.

관객이 조명을 비추어 이주 노동자들의 얼굴(<Black Painting - Myanmar Men>, 2023)을 끝끝내 마주하게 하고, 끝나지 않은 한 국가의 혼란한 상황들 을 담아내며(<붉은 홍콩>, 2023) 말할 수 없이 비극적인 순간 아래 스러진 이들을 기리고(<우리 다시 춤추자>, 2024) 콘크리트를 비집고 생을 잇는 잡초까지 (<Colliding Grass>, <Garden>, 2025) 작업은 이어진다. 작품들은 무거운 기억과 주제 아래 짓눌려진 그들의 시간을 단일하게 박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공적 공간에 발현시켜 그들이‘놓인’시간이 현재 진행형임을 상기한다. 빈집을 활용한 <커튼 콜>(2022),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여 시작된 <Gwangju is not over>(2020)에서도 이러한 기조는 동일하다. 그렇게 작가는 구체적이고 지시적인 장면을, 공간을 지지체 삼아 담아냄으로써 지난 사건과 기억이 그저 과거에 멈 춰 있지 않음을 환기한다. 즉 특정 사건이나 존재의 망각을 저지하고 지금 여기서 재생시키려는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래피티에 대한 논의를 빌려 작업을 더 들여다보자.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래피티는 '말해야 하는 충동'이라고 설명하며, 명시적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선언 또는 표현의 잔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에게 그래피티의 의미 부재는 역설적인 강렬함을 획득한다.1) 문학 연구자인 카일 프로얼(Kyle Proehl)은 그래피티는 사회적 관계의 상징적 파괴이자 텍스트(읽히는 것)와 이미지(보이는 것) 사이에 긴장을 드러내며 그 자체로 사회적 불안과 위기 의 상징이라고 주장한다.2) 두 연구자의 논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지알원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히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작가의 작업에서는 그래피티를 흔히 정의하는 선언적 제스처나 사회 구조와의 충돌의 관점을 넘어, 사건과 존재의 파편적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등장함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의 '각인'은 "지알원 왔다감"같은 착서(着署)가 아니라 작가에게 있어 가시화되지 않는 존재들의 모습과 이름을 발견하는 행위로도 치환할 수 있 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로서 제작한 <People I know> 프로젝트(https://peoplebygr1.blogspot.com/)를 살펴보자. 이 프로젝트는 ‘people, i know’라는 제목 의 아카이브 웹사이트이며 그간 작가가 만난 이들의 얼굴을 공간 곳곳에 새겨놓은 사진들이 업로드 되어 있다. 서울과 부산, 홍콩 등 아시아 국가들의 도시에서 인물 들은 일시적으로 퇴적된다. 그들과 작가 사이에 어떤 관계나 사연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작가가 그림과 함께 그들의 이름을 남겼다는 점이다. 익 숙하면서도 낯선 이름과 얼굴들이 과연'누구인지'를 고찰하는 찰나는 분명 작가의 작업 전반의 중요한 전략임은 명확해 보인다. 그렇기에 내게 작가의 회화는 그리 기라기보다 존재를 새기는 행위에 더 가깝다. 실상 거리에서/전시장에서의 작품과 이미지들은 언젠가 그곳을 떠나야 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거리에서/전시장에서 그들의 모습을 등대하며 이미지가 지속되는 동안 뻗어갈 서사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듯하다.

<Aftermath>(2024)에서 이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세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Aftermath>는 다른 작가가 사용하고 남은 목재들을 모아 그 안에 각자 다른 언 어들을 채워 결코 조합될 수 없는 퍼즐 조각들처럼 배열한다. <Aftermath>에 대해 작가는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맥락 속 사건이나 충돌 이후에 남겨진 흔 적들을 물리적인 형태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남겨지고 버려진 나무 조각들은 그 과정 속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미완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 리고 그 위에 스프레이 컬러를 덧입히며 그래피티(문화)적 흔적을 남긴다. (...)도시 속 거리의 유기된 공간에서 시작된 그래피티처럼, 소외된 것에 새로운 시선을 부 여하고 사라질 뻔한 이야기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고 말한다.3) 자신의 그래피티가 그러했듯 교착된 사건과 그 시간을 다시 작동시킬 동력이 무엇인지, 작가는 이미 알고 있다.


끝까지 (채워)말하기

파편화되고 잊힌 존재들을 호명하기 위해 작가는 자신에게 허락된(혹은 선택한) 공간을 그들로 채워낸다. 그것이 끝나지 않는 역사이든, 무의식적 소비 구조의 모 순을 드러내는 순간이든(<Byebye bebe>, 2021) 작가는 자신이 인지한 부조리를 끊임없이 공간에 채워야만 한다. 즉 부조리에 놓인 대상과 그들에게 깔린 서 사를 암시하는 텍스트 및 이미지를 그래피티처럼 전시장 혹은 그 외 장소에 틈 없이 메운다.

<우리 다시 춤추자>는 참사에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는 작가만의 방식으로 청춘과 관련된 텍스트를 태깅한다. 196개의 원형 캔버스들이 배치된 공간에서 각각 의 텍스트를 명확히 읽을 수는 없지만 증식하듯 확장된 그 이미지들 안에서 관객은 이를 다각도로 인지해야 한다. 테미예술창작센터 결과보고전에 선보인 신작 <Garden>(2025)은 다각형의 20여 개의 합판 위에 그려진 각양각색의 잡초들을 전시장 바닥에 놓는다. 사이에는 합판 제작 과정에서 발생된 잔해들로 구성된 삼각형 오브제들이 있다. 스프레이로 색을 입은 그들은 관객이 잡초들로 구성된 공간을 통과할 때 마치 걸림돌처럼 기능해 결국 이름 없는 이 식물들을 회피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렇듯 대상들로 포화 된 공간을 만드는 건 그 존재들을 관객에게 확언시키는 작가만의 방식이다. 그렇게 작가는 끊임없이 관객이 자신이 제시한 화면을 통해 그 순간과 시간을 어떻게 '알게할 것인지를 상상하고 헤아린다.

그 많은 작업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건 <발콘 프로젝트>(2023, 이하 <발콘>)이다. <발콘>은 <Aftermath>처럼 거리에서 주운 스티로폼의 부 분들을 조합하고 그 위에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터뜨려 만들어진 뜻밖의 '덩어리'들이다. 자본주의가, 도시가, 개인이 생산한 쓰레기 조각들은 깎이고 뭉쳐지며 색 을 입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껍질을 획득한다. 작가는 <발콘>에 대해 자신이 주목한 키워드가 '부산물이었고 거리에서 그래피티를 하던 태도와 이어지며 이 프로 젝트가 단순한 형식적 전환이 아니라 작업을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4) 나는 <발콘>에서 이전까지 작가가 대상의 이름을 보여주는 방식과는 또 다른 시도 가 반가웠고 동시에 앞서 제시했던 거친 질문들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었다. 그간 작업에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새기는 데 집중했다면 <발>은 그래피티 적 행위로 예기치 못한 결과가 도출됨을 환영하고 더 이상 파편이 아니게 된 개별적 오브제들의 장소를 만든다. 그래피티의 특성과 조각적 풍경이 섞여버린 그 안 에서 '누가 있는지’를 찾는 게 아닌, 그저 스프레이 페인트와 스티로폼이 만들어낸 각종 질감으로 도배된 부산물들의 기념비가 관객을 둘러싼다. 그래피티가 할 수 있는 물성과 표면을 배치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발콘>으로 작가적 정체성에 기울었던 나의 지난 질문은 비로소 물러날 수 있었다. 그래피티, 미술, 태깅, 회화 적 제스처가 무엇이든 작가는 그걸 기반으로 그저 대상, 사건, 장면의 파편들을 수면 위로 올려 관객과 조우시킬 방법을 찾아 나설 뿐이었다. 그렇게 작가는 이미 지생산자로서 세계에 내재한 균열을 포착하며 그 틈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역할을 자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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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obert M. Maniquis, Jean Baudrillard, “Interview with Jean Baudrillard: Catastrophic, but Not Serious”, Baudrillard Now (Vol. 2. Issue 2), accessed Nov 17, 2025, https://baudrillard-scijournal.com/interview-with-jean-baudrillard-catastrophic-but-not-serious/
2) Kyle Proehl, “On the Concept of graffiti”, SAUC Journal, vol.10, no. 2(2024), 91. 
3) 지알원, <Aftermath> 작가노트 참고
4) 지알원, 김미정에게 보낸 이메일, 2025년 10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