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김유진
수많은 사건들이 언론의 사회면에 등장해 이슈가 되었다가 금세 사라진다. 사건은 단기적 관심 속에 소비되고 다시 새로운 사건에 덮여 잊히고 지워진다. 우리는 소위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반복되는 사회적 재난을 추모하고 애도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라는 게 존재할까. 만약 그런 시간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의 기억은 그 시간에 비례할 수 있을까. 재난의 상황 속에서 불완전한 기억을 가진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기억을 통해 위치 지어진다. 기억은 한 사람을 시간의 연속선상에 위치시키는 것이며, 기억됨으로써 우리는 존재한다. 기억하는 일과 기억되는 일 모두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중요한 과정이다. 비록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기억되기와 잊히기를 반복하지만, 그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때로 어떤 흔적은 잊힌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덮이고 지워진 사건들 속에서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억하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작은 흔적을 발견해 내는 어떤 시선, 그 작은 흔적을 모두에게 드러내는 예술가적 시선은 잊힌 무엇인가를 기억하게 하는 가능성이다.
팔복예술공장 창작스튜디오 7기 결과보고전 《기억의 형이상학》은 과거의 기억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7명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다. 지알원 작가는 이 전시를 통해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우리와 다르지 않은 타인의 흔적을 기억한다. 작품 〈우리 다시 춤추자〉(2024)는 동일한 크기의 원형 캔버스 196개가 세로 7개, 가로 28개로 꺾인 벽면 위에 가지런히 설치된 대형 설치 작품이다. 높고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196개의 캔버스는 하나로 뭉쳐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한다. 밝고 화려한 컬러들로 칠해진 원형의 캔버스들은 그 자체로 모던한 현대미술, 하나의 설치 미술을 연상시키지만 가까이 다가가 캔버스 한 점 한 점을 살펴보면 전체와는 또 다른 부분, 파편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각각의 캔버스에는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한 영어 문장들이 그라피티 아트에서 주로 사용되는 스프레이 페인터로 새겨져 있다. (이 경우 그려져 있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새겨져 있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이 문장들은 청춘에 관한 시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지만 캔버스 196개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듯 캔버스 위의 시들도 전체가 아닌 일부이다. 이 흐릿한 문장들은 존재하지만 분명하지 않은 흔적들에 대해 인식하게 하면서 196개의 캔버스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의문을 갖게 한다. 전시에서는 이 숫자의 의미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사실 196이라는 숫자는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부상자의 흔적이다. 사고 이후 무수한 언론을 통해 오르내린 196이라는 숫자 안에는 실은 개별적 의미로서 196명의 부상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지알원은 이 작품을 통해 큰 사고를 겪으며 생존했지만 숫자로만 남겨진 혹은 숫자 안에서 기억되는 개개인의 흔적에 주목하여 다시 춤출 희망과 약속의 의미를 전한다.
또 다른 벽면에는 손글씨로 작성된 누군가의 평범한 계획과 꿈, 희망에 대한 메모가 담긴 〈인생 계획 세우기〉(2024)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전주의 한 제조 공장에서 사고로 숨진 19세 청년이 남긴 수첩 속 내용이다.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가 남긴 메모는 한동안 언론을 통해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왔다. 메모 속 내용은 알지 못했던 한 청년의 삶과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 한순간 이루지 못한 꿈의 일부로 변해버린 것을 목도하게 한다. 지알원 작가는 이 메모를 크게 확대하여 옮긴 후 다시금 우리에게 드러냄으로써 전혀 알지 못했지만 우리와 다르지 않은 타인의 흔적을 기억하게 하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작가는 타인의 이야기와 흔적들을 교차하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 혹은 잊힌 것들을 다시 꺼내 가시화한다. 사회적 재난, 참사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 놓인 개별적인 존재들과 그 흔적에 시선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마치 흔적이 전체가 아닌 아주 일부로 존재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은유적이고 비유적이다. 지알원 작가 본인은 이것을 일종의 '충돌의 부산물'이라고 표현하는데, 충돌이 하나의 사건이라 한다면 부산물은 그 사건의 흔적들과 사이에 남은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충돌이라는 어떤 사건과 이야기가 끝난 후 흩어지거나 소외되고 잊힌 듯한 그 부산물들은 여전히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한편 흔적에 관한 것은 작품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퍼즐 조각처럼 어딘가에서 잘려 나온 파편들로 이루어진 작품 〈이후(Aftermath)〉(2024)나 캔버스의 한 부분이 삭제되거나 조각나 재조립 된 〈붉은 홍콩〉(2023) 등 지알원의 많은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파편화, 조각화, 분절 등의 접근 방식은 남아 있는 '흔적'들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버려진 나무 합판이나 종이 펄프를 감고 있던 지관을 재료로 활용하는 등 물리적 파편과 부산물을 활용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흔적에 대한 관심은 그라피티 아트로 시작한 작가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라피티 아트로 먼저 활동을 시작한 지알원 작가는 주로 작품의 형식적 특별함으로 얘기되곤 한다. 깔끔하게 정돈된 전시실 내부가 아닌 온갖 삶의 흔적이 가득한 바깥에서 행해지는 그라피티 아트가 지알원 작업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지알원이라는 작가의 이름 또한 그라피티의 첫 글자를 딴 지알(GR)에 아라비아 숫자 원(one/1)을 붙인 것으로, 이름만으로 지알원의 작가적 정체성이 그라피티 아트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빠르게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그라피티 아트의 특성이듯 지알원 또한 흔적 '남기기'에 익숙한 작가다. 특히 그라피티 아트씬에서 작가가 자신의 서명이나 닉네임을 남기는 '태깅(Tagging)'이라는 흔적 남기기 행위는 '내가 여기에 있었다'는 의미이자 작가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우리 다시 춤추자〉에도 태깅 방식이 적용되었다.
지알원은 자신이 다녀간 장소에 의도적인 흔적을 남기는데, 우연한 장소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검은색과 하얀색의 '지알원 왔다감' 스티커는 작가의 또 다른 태깅 방식이다. 작가가 명함처럼 사용하곤 하는 이 스티커는 자신이 방문했던 장소나 거리에 남긴 작가의 흔적인 것이다. 이처럼 그라피티 아트의 태깅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겨온 지알원은 시선을 넓혀 타인의 흔적 혹은 잔존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작품에 그 흔적을 드러낸다. 흔적 남기기와 흔적 발견하기, 기억하기와 기억되기 사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흔적은 그라피티 아트와 어딘가 닮은 점이 있다. 현대미술과 그라피티 아트, 전시실 내부와 외부, 불법과 합법 등 사이와 경계를 오가는 작가는 재료나 표현의 한계를 두기보다는 그라피티 아트의 휘발성, 익명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흔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건들이 그 흔적만 남긴 채 잊힌다. 마치 거리의 그라피티 위에 그것을 가리는 또 다른 페인트가 덮이듯이 사건은 사건으로 잊히는 것이다. 하지만 "흔적은 항상 지워진다. 그러나 지워진 흔적은 오히려 지워지지 않는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남겨진 흔적은 오히려 더욱 강하게 기억될 수 있는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존재하지만 보지 못했던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대의 예술일 것이다.
참사와 재난이 반복되는 가운데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Giorgio Agamben, b.1942)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를 동시대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빛이 아닌, 시선이 향하지 않는 어둠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작은 흔적을 발견해 드러내는 것이 동시대 예술이 아닐까. 예술이 직접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로하고 공감할 수는 있다. 시대를, 그리고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할지 그 방향을 따라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서로가 발견함으로써 공감하고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함께 춤출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