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그래피티의 마당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놀고 자빠질 것이다.

- '41 PEOPLE WHO GR1 MET' PROJECT

신용철
(민주공원 큐레이터) 

GR1이 왔다간 자리를 더듬다.
 2015년 4월 24일~27일까지 장전동의 B-HALL에 그래피티 아티스트 GR1이 왔다갔다. 그의 등에 업혀 41명의 부산 아티스트가 전시공간에 스며 들었다가 다시 거리로 나들이 갔다. '41 PEOPLE WHO GR1 MET' PROJECT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GR1이 만난 41명의 부산 예술가들의 초상을 대형갱지에 보드마카로 그려 전시공간의 벽과 허공에 걸개 형태로 펼쳐놓은 전시이다. 굳이 나는 ‘걸개’라 고 부르고 싶다. 전시공간에 걸린 41명의 초상화는 처음부터 거리에 ‘걸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종이를 갱지를 쓴 것이나, 전지를 이어 붙여 크기를 확보한 것은 모두 거리에 걸기 위한 미적 고안이다. GR1은 전시공간 전시를 마무리 하고 얼마 동안의 시간을 두어 부산 시내 곳곳에 대형 갱지 초상화를 풀팅하였다. 거리에서 만난 부산 아티스트들을 전시공간에 모아서 같이 이야기 나누다가 이들을 다시 거리로 내 어 보내 사람들을 만나게 한 것이다. 

 나는 2014년부터 ‘멋대로 보는 부산’ 이라는 멋대로 맘대로 맛대로 하는 지역미술 프로젝트를 열고 있다. 2014년엔 사진가 세 분과 함께 ‘멋대로 보는 부산 2014 -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전시를 열었 다. 2015년에는 회화 작가 세 분과 함께 ‘멋대로 보는 부산 2015 - 있지만 없는 듯’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안타깝게도 GR1의 전시 소식을 나중에야 알았다. 미리 전시 기획을 알았더라면 나는 이 전시를 어 떻게든 나의 전시 기획으로 안았을 것이다. 나는 GR1을 만난 적이 없다. GR1도 나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어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이미 만났었다. 2014년 ‘무빙 트리엔 날레’ 기간에 중구노인복지회관에 'Big Sister is Watching You'라는 대형 벽화를 출품한 작가가 GR1이었다. 박근혜처럼 생긴 권력자가 망원경으로 우리를 감시하는 도상은 간결하고 명징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GR1의 미적 그물에 꼼짝없이 묶여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나를 불러들인 것이다. 

 GR1이 나를 부르고 내가 GR1을 만나러 가고, 그가 불러낸 예술가들의 그림을 만나고 또 이들 그림이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비바람 속에서 몇 달 동안 바래고 흩어지는 동안, 나는 GR1에게, 그가 귀 로 그린 발로 그린 말의 씨앗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곰곰이 가끔 문득 생각했다. 그가 보내준 말의 씨앗들이 내 안에서 자라는데 삭힘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내가 그 말들을 들려줄 때이다. 

경계예술, 경계미술
 지난 여름 서울대, 김일성종합대학, 연변대학 공동 학술행사를 다녀온 서울대 사회학과 박명규(통일평화연구원장) 교수 인터뷰 기사가 눈에 확 띄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김일성대학의 변화를 얘기하며 “학문 간의 융·복합을 북한에선 ‘경계과학’이라고 표현했다.”고 했다. ‘경계과학’ 맘에 드는 말이다. 우리가 요즘 흔히 쓰는 ‘융복합 학문’이라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융복합’은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서 하나가 되거나 뒤섞여 있는 것이다. ‘융복합’ 학문이나 예술은 다른 것들이 만나 새로운 갈래를 만들고 이를 뽐내려 한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본디 있던 학문(예술)이 융복합 을 위해 억지스럽게 불려오는 수도 있다. 억지스럽게 불려온 것들을 이어 붙이다 보니 제 꼴값과 구실을 못 하고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가끔 예술창작지원과 관련된 심의 자리에 나가거나 지원에 선정된 작 품의 연행 현장을 보러 가는 자리에서 이렇듯 제 목소리를 잃어버린 작품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것이 늘 안타까웠다.
 ‘경계’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만, 더불어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어지자지한 곳에 머물거나 떠다니다가 이것과 저것에 끼어들 고 딴죽 걸고 추임새 넣은 것이 ‘경계’의 꼴값이고 구실이다. 느닷없이 솟아난 새로운 존재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태도 곧 마음먹음이고 몸가짐이다. 존재가 되어 제 스스로를 뽐내기보다는 이것과 저것 사이 의 어름에서 태도로 머무는 것을 즐긴다. ‘경계’ 곧 ‘사이’를 잘 살펴야한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경계가 있다. 우리 현대사의 그물에는 윤이상, 송두율 같은 많은 경계인들이 있고 그들은 경계도시들에 산다. 영화감독 홍형숙은 다큐멘터리영화 <경계도시> 연작에서 우리 현대사가 만들어낸 위태로운 경계의 위상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경계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들과 우리들이 사는 마을과 마을 사이에 도깨비가 산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귀신이 산다. 한국 도깨비와 귀신은 제꼴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머리에 뿔이 달려있고 가죽옷을 입은 도깨비의 꼴 은 일본 도깨비 오니(おに)의 꼴이다. 우리 도깨비와 귀신은 꼴이 없으나 꼴값과 구실만 남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들은 늘 우리들 어름에 어슬렁거리다가 우리를 때론 골리기도 하고 때론 같이 놀기도 하는 경계의 목숨들이다. 경계의 목숨들이 갖추고 있는 갖가지 꼴값들은 우리들의 꼴값을 비추는 거울이다. 

 메타(meta)는 빗대어서 얘기할 것의 꼴을 빌어서 그것의 꼴값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다. 메타시는 시의 꼴을 갖추고 있되 시의 꼴값을 차리게 하는 시이다. 메타연극은 연극의 꼴을 갖추고 있되 연극의 꼴 값을 차리게 하는 연극이다. 경계는 이것과 저것을 들여다보는 메타의 영역이다. 경계를 잘 살펴야 이것도 살고 저것도 살 수 있다. ‘경계과학’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우리네 융복합 학문과 예술의 현장 이 놓치고 있는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제 선 자리를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늘 새로울 수 있다. 살아있는 목숨들은 늘 그러해야 한다. 우리의 융복합 학문과 예술이 살아있으려면 제 경계를 낯설게 알아차려 야 한다. 

사이에서 노닐며 골려주기/놀려주기
그래피티는 거리에서 태어난 예술이다. 거리에서 꿈꾸는 이들의 꿈틀거리는 손길과 발길에서 마련된 꿈의 틀이다. 꿈의 틀 위에서 노래가 춤추고 춤이 노래하고 말길이 열린다. 거리는 그래피티가 춤추고 노 래하고 말길을 여는 꿈의 마당이다.
 거리에서 자라난 그래피티가 떼어져 전시공간에 설치되고, 설치되었던 작품이 경매를 통해 유통이 되는 과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피티는 제 스스로 제 꿈의 자리를 잊은 적이 없다. 여기에 GR1의 프로젝 트가 자리잡고 있다. GR1은 41명 아티스트들의 걸개초상화를 전시공간에 잠깐 설치했다가 다시 거리에 내걸었다. 창작-전시행위는 한 묶음의 스토리텔링으로 엮여 있다. ‘(아티스트) 만남 - 그림 - (전시관 람객) 만남 - (거리의 대중) 만남’이라는 짜임새로 되어 있는 창작-전시 스토리텔링은 GR1이 그래피티의 미적 지평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보여준다.  

 GR1의 작품은 제 경계를 낯설게 알아차리고 있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어지자지한 사이에서, 있지만 없는 듯, 보일 듯 말 듯, 여전히 늘 그 낌새와 조짐으로 머물다가, 때때로 어느덧 재빨리 골탕먹 이고 놀려주는 것이야말로 GR1이 마련한 그래피티의 꿈틀이다. 나는 GR1이 만들어낸 장난꾸러기, 악동들, 도깨비, 귀신들이 전시공간과 거리를 활개치며 우리 시대 마초, 꼰대들이 퍼질러놓은 ‘터전을 불 사르고’(Burning Down the House_Talking Heads) 새로운 말의 씨앗을 뿌리기를 꿈꾼다. 나는 그 마당에서 너희들의 놀림을 받으며 춤추고 노래하며 놀고 자빠질 것이다. Peace!!!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