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스트리트에서 스튜디오로 - 감각이 사유로 확장될 때

조숙현 (전시기획자 / 미술비평가)


 GR1은 그래피티(graffiti) /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로 시작하여 순수회화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GR1’은 ‘Graffiti’의 앞 글자 GR과 숫자 1의 합성어이다. 숫자 1은 ‘number one / only one’을 의미하며,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자신이 최고다’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는 기호이다. 그가 제일 처음 그래피티를 그린 것은 고등학교 1학년, 고향 부산에서부터였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예술세계는 여러 계기를 겪으며 확장되었다. 그런데 그 방향성이 여타의 작가와는 견줄 수 없는 흥미로운 지점을 가지고 있다. 

 지알원은 부산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의 지역 신문사의 편집부에서 회사생활을 하며 그래피티 활동을 이어오던 중, 2010년 작업 중 체포되어 구금되고 재판을 받은 경험이 있다. 무력한 구치소에서 밤을 새며 그가 내린 결론은 놀랍게도, ‘이왕 위험을 감수하고 하는 일이니, 앞으로는 나만의 스타일을 구축하자’ 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래피티의 지속성에 대해 고민할 수 있나요? 그래피티를 그만두는 일은 왜 선택지에 없나요?” 라는 비평가의 질문에 그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그건 그냥 너무 당연한 거예요” 라고 답했다. 

 지알원의 그래피티는 일반적인 ‘프리스타일’ 그래피티와는 차별화되는, 완성도 높은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 그래피티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담은 ‘시그니처 스타일’과도 차별점을 이룬다. 얇은 갱지를 여러 겹 겹쳐서 캔버스처럼 활용하고, 그 위에 미리 블랙 엔 그레이 톤의 드로잉, 스텐실 그림을 그려둔다. 이렇게 미리 작업한 대형 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페이스트 업(paste up) 방식을 통해 그래피티를 완성한다. 블랙 엔 그레이 톤의 작업은 서양의 그래피티와는 차별화되는 지알원만의 한국적인 컨텍스트를 자아낸다. 빠른 시간 안에 큰 사이즈의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그래피티 아트의 특성상 페이스트 업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피티/스트리트 아트는 문화연구에서 대표적인 하위문화(subculture)로 분류된다. 특정한 집단 내의 가치, 규범, 행위가 일정한 패턴을 나타낼 때 하나의 하위문화로 지칭된다. 대개 저항정신을 띠며, 주류문화(mainstream culture)와 구분된다. 스트리트 아트는 시각예술문화의 대표적인 하위문화로, 살롱문화의 네트워크와 화이트큐브의 공간성과 대비된다. 화이트 큐브와 살롱문화가 주류 미술세계의 엘리티시즘을 드러내는데, 스트리트 아티스트는 그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익명의 창작자로 남는다. 작가의 인장 대신 익명의 X로 존재하는 것이 그래피티/스트리트 아티스트의 특징이며 하위문화의 야생성을 형성한다. 그런데 지알원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스트리트 아트의 익명성이나 집단성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발언권을 가지려 한다는 점이다. 그래피티나 스트리트 아트는 크게 하위문화로 카테고리화 되지만, 뱅크시(banksy),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의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 등의 일부는 현대미술 작가로 인식된다. 여기서 그들이 그래피티 장르 안의 관습과 익명성에서 탈피하였다는 데 주목하여야 한다. 

  지알원의 작업은 인장을 남긴다. 주제와 형식면에서 안팎으로 작가의 대체불가능성을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표출하고 싶은 심리가 강하게 읽힌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대미술 작가들의 특성이 아닐 수 없다. 미술은 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예술가 개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사하였다. 2014년 부산 무빙 트엔날레에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어조의 ‘BIG SISTER IS WATCHING YOU’는 사실 스트리트 아티스트의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부산 구도심(영도)과 서울 홍대, 이태원 뒷골목을 무심코 걷다보면 어김없이 마주치는 ‘GR1 왔다감’ 스티커는 (특히 홍대 모 뒷골목은 거의 도배 수준이다)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 표출 심리가 강하게 느껴진다. 

 흥미로운 점은 소마미술관에서의 개인전, 홍익대 회화과 석사로의 입학, 그리고 OCI 레지던시 입주 등에 이르기까지 제도권 안으로 확장하려는 그의 시도이다. 스트리트 아티스트에서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순수미술의 영역으로 넘어오는(밖에서 안으로) 움직임은 지알원만의 독특한 행보이며, 관찰자로 하여금 강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 사람 뭐지?)
 
 지알원은 또한 감각이 차츰 사유로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형식과 스타일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2015년 진행한 프로젝트 <41 People who GR1 met>은 부산을 중심으로 문화 관련 종사자(기획자, 작가 등) 41명을 그래피티 아트로 표현한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 권의 자료집으로도 출간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작가의 주변 인물을 관찰하고 표현하며 기록하려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래피티 아트의 일반적인 프로파간다, 저항의 서사 등을 넘어 주류 미술이 가지고 있는 과정을 매우 많이 닮아 있다. 또한 예술의 지속성에 관한 한국의 젊은 작가와 기획자들의 고민을 공유하고 사유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알원의 순수회화는 말 그대로 길거리에서 캔버스로 액자화된 작업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회화를 이해하고 응용하는 방식인데, 길거리 벽화에서는 오브제와 주제 자체를 부각시켰다면, 캔버스 안에서는 그가 지금껏 애정을 담아 활동해온 그래피티 아트 씬(scene)에 대한 맥락이 함께 담겨 있다. 길거리 낙서들(‘지알원 왔다감’ 스티커 포함), 쓰레기통, ATM 기계, 을지로 철거 현장(2018~2019)에 남겨진 그래피티와 재개발 충돌 현장 등은 원본이 실물을 복제하는 재미있는 아이러니를 생성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그래피티라는 문화와 장르가 한국 사회에 어떻게 뿌려지고 흡수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의 작업의 화두이다. 이것은 실물과 실물의 싸움이며, 스트리트 아트의 액자이며, 한국 그래피티 아트의 역사와 씬(scene)을 증명하고 기록하려는 현대미술 작가의 고함이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