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화이트 큐브로 소환된 거리, 사람 이야기

신보슬(큐레이터)


얼토당토않게 들리겠지만, GR1의 포트폴리오를 뒤적이는 내내 머릿속에서 <프란다스의개> 주인공 네로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네로는 주정꾼 주인에게 버림받고 추위에 떨고 있던 늙은 개 파트라슈와 함께 살게 된다. 궁핍하고 힘든 삶이었지만, 네로에겐 할아버지와 파트라슈, 그리고 친구 아로아가 있었고, 무엇보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네로와 파트라슈는 마을에서 쫓겨난다. 게다가 출품했던 작품이 대회에서 낙선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겨울, 네로는 파트라슈와 함께 그가 동경했던 루벤스의 그림을 보기 위해 안트베르펜을 찾는다.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네로가 평생 보고 싶어 했던 <십자가에서 내림 The Descent from the Cross>(1612)는 평소 커튼 속에 감춰져 있고, 금화 한 닢을 내야 볼 수 있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성당지기는 네로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림을 보여준다.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감동한 네로. 소원을 이룬 네로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파트라슈를 껴안고 깊은 잠 속에 빠지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 아이였던 나는 네로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네로가 죽은 것이라는 사촌오빠의 이야기에, 아니라고 네로는 그냥 자는 것이라며 우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참을 지나 전시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지내면서 종종 루벤스의 그림 아래에서 잠든 듯 편히 세상을 떠나는 네로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다. 루벤스의 그림은 네로에게 위로였을 것이라며 근거 없는 추측을 해 본다. 그리고 과연 오늘날 예술이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가 될 수 있는지/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본다.


네로와 루벤스, 그래피티와 현대미술, 화이트큐브와 거리, 위로와 공감.

GR1의 작품을 보며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1. GR1은 그래피티 아티스트였다.

GR1이라는 이름은 Graffiti number one / Graffiti only one을 뜻한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이름에서부터 본인의 스트리트 출신임을 명백하게 밝힌다. 그는 분명 그래피티 아티스트였다. 고등학교 1학년 고향인 부산에서 그래피티 작업을 시작하여, 시카고 지역 신문사에서 일할 때에도 그래피티 작업을 계속해왔다. 작업중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경험도 있다고 한다. GR1을 처음 만났을 때 건네받은 작은 책자 한 권은 그의 그래피티 작업을 모은 것이었다. 


#2. GR1의 기법은 다분이 그래피티 작업에 근간한다.

조금 늦게 미술계라는 곳에 들어왔지만, GR1에게는 이미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기법이 있다. 짐작하듯, 그 기법들은 그래피티 문화에 근거한다. 하지만, 그의 기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럽의 뒷골목이나 기차에 그려진 그래피티와는 다른 방식이다. 얇은 갱지를 여러 겹쳐서 캔버스처럼 사용하여, 그 위에 블랙 엔 그레이 톤으로 드로잉이나 스탠실 작업을 한 다음에 이미 준비한 대형 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방식인 페이스트 업 (Paste up) 방식을 사용한다. 갱지를 겹쳐지기 때문인지, 그려진 이미지 때문인지 그래피티적 느낌보다는 한국적이라는 느낌이 더 많이 들지만, 어찌 되었든 그의 작업방식은 그래피티 작업에 근간한다. 


#3. GR1에겐 (아직) 그래피티 정신이 남아있다. 

“나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관계의 교차점에서 갈등의 상황에 놓여 있거나, 그러한 갈등으로 일어난 충돌과 그에 파생되는 부산물에 관심이 많다..... 세계화라는 현상은 많은 부분에 경계, 국경이 사라지고 자본뿐 아니라 문화와 사람 간의 교류를 촉발 시켰다. 이런 교류의 이면에는 다양한 충돌이 일어나고... 충돌의 이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부작용, 부산물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나는 이러한 부산물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충동 당시 당사자가 아닌 타자의 수면 아래 가려져 있던 지점은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이를 담론의 장으로 끌어오는 작업을 그래피티, 거리예술, 회화, 영상 등으로 확장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작업 노트에서)


작가 노트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듯이, GR1의 작업은 사회적 갈등과 충돌, 여기에서 비롯되는 부산물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위문화의 다양한 이슈들, 동물권, 청년 문제, 환경문제 등 그의 작품이 다루는 주제들은 다분히 정치, 사회, 문화적인 이야기와 닿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동시대성,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5.18과 관련된 다섯 곳의 상징적인 장소에 2019년 홍콩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보도된 이미지들을 중첩시킨 <Gwangju is not over>(2019)는 기존의 그래피티가 가지고 있는 스티리트의 장소성, 현장성, 그리고 동시대의 이슈를 잘 연결 지은 작품 중 하나로 보이고, 여전히 그에게 남아있는 그래피티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4. 거리에서 나와 화이트 큐브에 초대된 그래피티

하지만, 최근 그의 활동과 작품의 공간성이 거리에서 화이트 큐브로 옮겨졌고, 그래피티의 날선 공격보다는 따뜻한 위로(혹은 공감) 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 페인트 마커와 스프레이로 배민 라이더스를 그린 <Run! Baby Run!>(2021)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거래되는 노동과 근로 형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지만, 시스템의 문제에 대한 분석과 비판보다는 라이더스를 만들어낸 이미지가 먼저 다가오고, 전태일 기념관에서 개최되었던 <천 일 동안> 전시에 출품되었던 <컵라면>(2022) 역시 컵라면으로 끼니를 떼울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한 논의 보다는 대형 벽면을 가득 채운 컵라면 이미지와 이름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론, 작품의 이미지가 시각을 사로잡는다는 것이 문제 될 것은 없다. 전시장에서 찬찬히 작품을 보다 보면, 작가 노트를 읽고 작품설명을 듣다 보면 작가의 의도에 닿을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화이트 큐브에서의 GR1의 작업에는 그래피티적 제작방식은 명확하지만, 거리에서의 그래피티가 가지고 있었던 속도감이나 날카로움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5. 그래피티를 떼고 본 GR1의 작품들

문득, 스트리트 아트, 그래피티 작업을 해오던 작가였다는 사전 정보가 작품을 오독하게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작가의 이전 작업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이전 작품의 틀에 새로운 작업을 끼워맞추는 오류를 범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피티라는 레이블이 없이 GR1의 작품을 다시 보기로 했다. 


최근 작품인 <#&#&#>(2022) 해시태그 그리고 해시태그, 그리고 해시태그, 역시 ‘그래피티라는 서구권의 문화를 그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해석하는 한국 그래피티 1세대 작가’(박민진, 2022)라는 소개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그래피티와 연관되어 있다. ‘GR1 왔다감’이라는 스티커를 길거리나 미술관, 갤러리에서 보여주는가 하면, 성수동의 도만사(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거리를 채운 자신의 그래피티를 공간 안으로 가져온다던가, 작가가 가보지 않은 홍콩이나 도쿄, 타이페이 거리 이미지에 ‘그래피티’라는 태깅이 달린 이미지들을 본격적으로 화이트 큐브 전시 공간에 들여와 벽면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이미지에서 보이는 한자로 인해 동양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기에 이미지의 레이어가 좀 더 다양해지는 듯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래피티라는 것 보다, 그래피티라는 매체를 통해서 그가 바라본 공간에 대한 이야기, 공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감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렌지색 격자에 갇힌 이미지들, 실제 그래피티가 있는 거리의 모습이 화이트큐브 안에서 재현될 때 어떤 의미가 생성되는지, 골목길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인물에 왜 감정이 이입되는지, GR1의 작업에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아마도 이미지 너머의 이런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전시되었던 <부딪히는 풀> 시리즈는 GR1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러한 측면을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GR1의 작품에 그려진 식물들은 소위 말하는 귀화식물들이다. 귀화식물이란 인위적 혹은 자연적으로 국내에 유입되어 자력으로 토착화하는 식물들을 일컫는데, 대체로 토종식물에 위험하거나,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 혹은 생태계를 망친다는 등의 이유로 해서 제거해야 하는 식물로 불린다. GR1은 4mx2m의 거대한 사이즈의 귀화식물들을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에 1996년 사망한 미국 래퍼인 투팍(2PAC)의 사후에 나온 시집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라는 시집에서 발췌한 부분들을 스프레이로 썼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식물 스스로 귀화한 것도 아닌데, 그것에 덮인 오명, 식물은 억울하지 않을까? 귀화식물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부딪히는 풀> 앞에서 쉽사리 시선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은 그 이야기가 비단 식물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플란다스의 개>에게로 돌아가서,

도대체 왜 나는 GR1에게서 네로와 루벤스를 보았던 것이었을까.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다. 굳이 생각해보자면, 하나하나 번호를 매겨 보아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자면, GR1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대상에 대한 공감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치열하다. 강해야만 살아남는 것 같다. 원치 않아도 겪어야 하는 일들이 많고, 바꾸고 싶어도 저 놓고 견고한 성벽은 쉽게 허물어질 것 같지 않다. 그 앞에 선 나는 한없이 작고 무기력하다. 화려한 네온에 가려진 뒷골목의 삶을 직면하는 것, 그 삶의 한 켠을 드러내는 것은 공감하는 것이고, 함께 보자는 소심한 제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뒷골목에, 길거리 담벼락에, 기차에 그림을 그리고 도망가야 하는 작업을 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거리의 모습을, 그 거리의 사람들을 화이트 큐브로 초대한다. 금화 한 닢을 내면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성당의 루벤스 그림처럼 화이트 큐브라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그림 아래에서 평온하게 잠들었던 네로처럼, 누군가는 또 위로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그의 그림 앞에서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