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대각선 diagonal

주시영(디렉터,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지알원 개인전 / 2023. 10. 28. – 12. 2.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은 2023년 10월 28일(토)부터 12월 2일(토)까지 지알원 개인전 《대각선 diagonal》을 개최한다. 《목줄 없는 개들》, 《부딪치는 풀》 이후 열리는 세 번째 개인전 《대각선》은 그라피티 작업에서 출발한 지알원의 회화를 새롭게 소개하고, 그의 회화에서 파생된 조각과 영상 작업을 선보인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이 속한 지역의 경계를 동(남)아시아로 확장시켜 규정함으로써 홍콩-한국-미얀마를 주목한다. 현대사의 흐름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쟁점은 세 국가 사이를 오가며 묘하게 겹친다. 작가는 스스로가 규정한 로컬의 경계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며, 자신을 둘러싼 지역(아시아) 안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교차점을 총 네 개의 범주인 #붉은 홍콩, #Balcon Project, #한국 색, #Black Painting으로 구성하여 전시 《대각선》을 전개해 나간다.

지알원의 회화가 갖는 그라피티graffiti 정신은 지알원과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라피티가 도시의 공공 공간에 침투하여 메시지를 내는 것으로 자본과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일종의 담론 형성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지알원은 많은 이들이 간과하거나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는 이의 눈앞에 무심하게 내놓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던진다. 그는 자신의 작업 속에 숨어있는 힌트를 슬쩍 꺼내놓는 방식을 취할 뿐이다. 힌트를 발견한 이들은 서로 질문을 던지고, 이미지를 떠올리며, 채워지지 않은 빈 퍼즐 조각을 상상해 나갈 수 있다. 지알원의 회화가 담은 날카롭고 매서운 메시지와 무디고 따뜻한 공감의 공존이 담론의 여지를 만든다. 
금지된 공간에서 유한한 시간의 제약 내에서만 유효한 그라피티는 곧 사라질 존재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려고 한다. 사회의 부산물로써 잠시나마 그 공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점유하는 것이다. 작가는 부산-서울-시카고를 거치면서, 거주하거나 머물렀던 여러 도시에 그라피티 작업을 남겼다. 그라피티가 허락되는 도시의 주변부는 자본의 침전물이 쌓이고, 충돌로 떨어져 나간 파편이 모여들고, 먼지와 쓰레기가 뒹구는 곳이었다. 그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던 곳에서 경험한 수많은 충돌과 교차점이 그의 회화 안에 자연스레 숨어들었다. 마천루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목에서 발견한 경계의 경험을 미술관 안으로 들여옴으로써 작가는 동시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관람자의 눈앞으로 성큼 끌어당겨 놓는다. 

#붉은 홍콩
지알원의 시티스케이프(cityscape) 시리즈 중 하나로 20세기 말,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는 장면과 21세기 초, 홍콩의 민주화 운동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소환한다. ‘서울’에 이은 두 번째 시티스케이프 시리즈 〈붉은 홍콩에서 작가는 그라피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밀레니엄과 함께 붉은 땅이 되어버린 홍콩 거리의 벽면 사이사이에 검은색의 민주화운동 장면이 끼어든다. 충돌은 폭발적이고 일회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것일 수 있다. 작가는 전시의 키워드인 충돌을 벽면에 펼쳐놓았다. 마치 퍼즐 조각처럼 보이는 이 그림들은 힘의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쇄적이고 단계적인 힘이 붉은 홍콩 거리에 응축되어 있는 것처럼 읽힌다. 거리의 벽에 각자가 그리고자 하는 그라피티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충돌과 조화의 과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작가는 오랜 경험을 통해 배워온 것 같다. 흐트러져 있는 듯 보이지만, 작업의 에너지는 언제라도 자신을 뿜어낼 준비를 한 채 불균형과 균형 사이에 질서를 부여한다. 〈붉은 홍콩은 지알원이 주목하는 충돌에 대한 힌트를 던지는 듯하다. 각자의 영역 확장에만 집중된 결과로 파생된 충돌은 피해를 낳는다. 그는 힘의 균형과 질서를 깨뜨리는 충돌에 주목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자들과 그들이 모이는 주변부를 살핀다. 

#Balcon Project
지알원은〈Balcon Project에서 대량생산과 소비중심의 도시 안에서 버려진 것들을 위한 모뉴먼트monument를 세운다. 지알원은 무엇을 기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는 무엇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고자 하는가. 도시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이 기념비들은 고도화된 산업사회의 미니어처다. 대량생산, 품질향상, 안전배송의 과정에서 역할을 다하고 버려진 것들로써 대개는 쓰레기로 폐기되어야 할 것들임에도 작가는 이들을 탈락시키지 않는다. 도시를 움직이는 메커니즘이 자본의 이동경로를 충실히 따라갈수록 더 많은 부산물이 생겨난다. 이것은 쓸모를 다한 물건들과 쓰레기들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인간다움, 도덕, 윤리, 규범의 경계에서도 우리는 버려진 양심을 발견한다. 보이지 않는 가치의 충돌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그 값의 변화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어떤 목표와 목적을 지향하는지, 내 삶의 가치를 매기는 기준이 사라진 지금의 현실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가. 지알원은 쓰레기를 모아 높이 세워놓고, 스프레이로 뒤덮는 행위를 통해 충돌의 기념비를 쌓아올렸다. 스프레이 작업은 물리적인 충돌과 재료의 충돌을 동반한다. 스프레이로 색을 입히기 위해서는 노즐을 통해 응집된 힘을 분출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한데 엉긴 에너지가 분출되는 힘을 통해 그의 작업이 완성된다. 맞부딪치는 힘의 작용이 기념비를 물들인 것이다. 화려한 모뉴먼트의 행렬이 도시의 경계를 따라 걷는다. 

#한국색
한국산업이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던 1970년대 이후, 대규모 재벌기업들의 주도적 성장으로 수출 중심의 제조업체들도 성장 곡선을 탔다. 구로공단이 전신인 이곳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역시 구미, 울산 등과 함께 수출 중심의 산업을 이끌었던 최전방에 있었다. 한국 산업의 구조적 특징은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형성 전반에 영향을 끼쳤고, 이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개개인의 삶에 ‘한국 색’을 입혔다. 지알원은 한국의 색을 한국 산업의 산물(그것이 주산물이든, 부산물이든)로 보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색의 산업용 스프레이 30여 개의 컬러를 매칭하여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 총 496개의 색 조합을 만들었다. 그는 이것을 〈한국색으로 명명하는 것으로 한국의 산업화 과정과 그 과정에 숨어있는 크고 작은 496개의 이야기를 던진다. 아버지 세대의 노동과 자녀 세대의 노동을 동시대 안에서 해석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의 성장 그래프는 대각선을 그리며 급격하게 뻗어나갔다. 모두가 바라보던 하나의 목표에 다가갈수록, 우리가 놓아버린(혹은 놓쳐버린) 가치의 값은 어떻게 환산할 수 있을까. 글로벌리즘globalism을 외치던 목소리 반대편에서 로컬리즘localism이 대두된다. 삶의 장소로서 로컬을 지향하는 태도가 사회적 충돌을 완화할 수 있다고 할 때, 지알원이 규정하는 로컬의 범위는 내가 사는 지역과 국가를 넘어 아시아로 확대된다. ‘아시아인 지알원’은 한국산 산업용 스프레이를 들고 ‘한국색’을 입힌다. 두 면을 맞댄 한국색의 반복적 패턴은 한국-아시아-글로벌 삼각의 어지러운 반복으로 번진다. 

#Black Painting
검은 방에 들어선 관람객은 인터뷰 영상 〈연무〉에 등장하는 10인의 미얀마인의 얼굴에 둘러싸인다. 지알원이 그린 ‘얼굴’은 그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지알원은 2021년 실험적으로 시도했던 영상작업 〈#Miyanmar Project〉를 통해 이미 미얀마의 상황을 그의 방식대로 보여준 바 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마주한 작가와 인물들의 대화 뒤로, 관람객 역시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이주에 관한 많은 이슈들과 사회적 충돌 저편에서 작가는 동시대를 사는 이주노동자들의 일상을 덤덤하게 듣는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통계 속 숫자에 숨겨진 이들,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아 외면되거나 지나쳐버려진 아시아 전역의 민주화 운동과 희생의 실재를, 굳이 플래시를 켜서 들여다보게 한다. 우리도 그러한 역사를 지나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사회적 충돌의 현장이 우리 삶 가운데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듯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작가가 던지는 무거운 질문이 검은 방을 가득 채운다. 검은 방 속, 그가 채워놓은 얼굴들은 어딘가에서 본 얼굴들이다. 이 얼굴들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과거 어느 시점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과 문제들이 어떤 지점에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지알원의 회화가 갖는 메시지와 공감, 자기주장은 전시 《대각선》에서 한층 강화된다. 힘의 충돌, 경계, 교차점, 부산물, 희생물과 같은 맥락 안에서 선회하던 작업들은 서서히 구조적 문제에 도달한다. 그리고 작가는 종국에 도달한 구조가 텅 빈 얼개가 아닌 개개인의 집합인 것을 놓치지 않는다. 전시는 구조적 문제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얼굴’을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관람자의 얼굴과 작가의 얼굴, 익명의 얼굴들이 전시장 안에서 교차하는 지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시도는 현재, 지알원이 자신의 회화가 주장하는 바를 온전히 의식하고 있으며, 회화를 통해 그가 던지는 개인과 구조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 우리 모두의 시선이 교차하는 곳에 놓이도록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23